[기후소설] 출근길의 상상
'80만년 전 조상들처럼...'
오늘 아침 8시, 신분당선을 타고 기후기사를 검색하던 나는 네이처 논문으로 발표됐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게되었다. 기후변화로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주를 하게된 인류의 조상 중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아 지금의 인류가 됐는지를 추적한 이야기였다.
"연구진이 특히 주목한 건 80만년 전이다. 이 시기부터 지구의 빙하기가 더 길어지고 추워졌는데, 유독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다른 종보다 더...."
기사에 몰입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는, 식량위기에 산불과 홍수 폭염 그리고 혹한...그 때 귀에 익숙한 여성의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정차할 곳은 양재, 양재역입니다.'
아차 싶어 후다닥 일어섰지만, 빠져나가기까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지옥철, 한꺼번에 내리려는 사람 틈에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리며 가까스로 지하철을 빠져나왔지만, 이미 올라가는 통로는 사람들로 꽉 막혀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을 택했지만 그조차 사람들이 많아 힘겨웠다. 한 걸음, 한 걸음씩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만일 이대로 시간이 흘러 2050년이 되면 지금 이 출근길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때는 2050년 4월14일,
오전 10시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지옥철이다. 인구의 95%가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살기 때문이다. 푸른 밤을 찾아 제주도로 떠났던 사람들도 서울로 돌아왔다. 해수면이 높아져 쓰나미와 태풍에 집이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고 전원생활을 하던 이들도 돌아왔다. 연중 행사가 된 산불로 인해 집이 불타 없어지거나, 매캐한 산불 연기 때문에 도저히 못살겠다는 거다. 도시라고 안전하지 않다. 미세먼지가 해를 가리고 파괴된 오존층 틈으로 자외선이 쏟아졌다. 4월인데도 아침부터 푹푹 찐다. 오전 10시 바깥 기온 30도. 수시로 쏟아지는 산성비와 우박, 그래서 사람들은 지하로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철과 지하상가는 이제 잠시 거쳐가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주거지역이자 상가밀집지역이 됐다. 지하인간, 그래서 서울의 지하철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지옥철이다.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곳곳에서 삑삑 소리와 함께 환승안내음이 흘러나온다. 광란의 소음이다. 무려 10개의 개찰구에서 쉼없이 그 소리를 뿜어내고 있으니, 민원이 급증해 안내음의 데시벨을 낮추긴 했지만 그렇게 낮춰진 소리가 끊임없이 합창을 해대니 도무지 견딜 수 없다. 소음지옥을 빠져나와 3호선 통로, 여기부터는 상가지역이다. 30년전에는 이곳에서 간간히 빵이나 떡을 팔았지만 지금은 거의 이마트 수준의 다양한 점포들이 입점해 있다. 가장 눈에 띠는 건 채소 가게이다. 상추 한 봉지에 1만원. 브로콜리 두 송이에 국내산은 5만원, 중국산은 3만원.
"엄마, 채소 농민들은 대박나겠어요."
"얘는...농민들 다 사라졌잖니?"
"그럼 저 채소는 누가 키운 거예요?"
"대기업들, 스마트 팜에서..."
"스마트 팜이요?"
채소는 이제 이마트같은 대기업 유통회사가 직영하는 '스마트 팜'에서 재배된다. 기후변화로 농작물 생산이 극도로 불안정해지자 농민들은 망했고, 대신 온실 내 수경재배 시스템을 갖추고 인공지능으로 온도와 습도, 인공태양광까지 조절해 채소를 키우는 일종의 식물공장인 스마트 팜이 채소재배를 전담했다. 더이상 농민은 필요없다. 공장 직원도 최소한의 숫자로 운영된다. 나머지는 알고리즘에 따라 운영되는 인공지능들이 담당한다.
"열차가 매우 혼잡합니다. 다음 열차를 이용해주세요."
겨우겨우 3호선으로 갈아탔다.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 빈 틈을 파고드는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째려본다. 아참참...하며 메고 있던 백 팩을 손으로 들었다. 백팩 예절, 30년에는 이런 행위를 남을 위한 배려나 예절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예절이 아니다. 생존수단이다. 살아남기 위한...며칠 전에도 지옥철 안에서 백 팩을 메고 있던 사람이 옆 사람에게 폭행당해 숨지는 '백팩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니까.
나는 백 팩을 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는 물건들이 백팩안에 있으니까. 생존도구, 첫번째는 방독면이다. 잠시 후 지하철을 빠져나가 거리로 올라가는 순간 엄습하는 초미세먼지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유일한 도구...구청에서는 보도 위에도 투명 유리를 설치해 먼지를 차단한다고 홍보하지만 이걸 액면 그대로 믿는 바보는 없다. 개인의 건강은 개인이 지켜야할 뿐, 또 하나의 생존도구는 접는 우산이다. 지하철 역사에서 불과 300미터 거리에 사무실이 있지만, 거기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비가 후두둑 쏟아지는 일은 이제 일상다반사가 됐다. 산성비, 한 방울이라도 튀는 순간 나의 소중한 모발은 빠지기 마련...접는 우산은 온 국민의 백 팩안에 내장되어 있다.
'75층으로 올라갑니다.'
사무실이 있는 16번가 빌딩에 무사히 도착,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석대가 운행되지만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100층 건물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에 100층 빌딩이 들어선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다. 더이상 기존 건물로는 서울로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를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여야 합의로 고도제한부터 용적률과 건폐율 제한을 풀었다. 사무실도 백층, 아파트도 백층,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소모하는 에너지는 어떻게 하냐고? SMR. 소형원자로를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설치했다. 원자력 업계의 오랜 숙원이 이렇게 풀린 거다. 그러나 희생양이 필요했다. 어느 동네에 원자로를 설치? 당연히 강남 4구는 아니다. 용산도 아니다. 불쌍한 강북 지역 재개발 지구가 선정됐다. 서울시민 주민투표라는 다수결의 장치가 있었기에 찍소리도 못하고 통과됐다. 시장은 SMR 지구 주민들에게 엄청난 복지를 약속했다. 어린이집부터 대학교까지 자녀 학자금 무상지원, 제로에너지 공공임대 아파트 우선 입주까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민들이 요구해온 암 정밀검진만은 시행하지 않았다. 언론은 모른 채 넘어갔다.
"노조 긴급공지, 노사협상 결렬'
문자메시지가 왔다. 18차에 걸쳐 진행되는 노사협상이 끝내 결렬됐다는 소식이다. 30년전에는 노사협상이 주로 기본급이나 사내 복지에 대한 것이었다면 2050년의 노사협상 테마는 오로지 이거 한가지다. 낡은 공기청정 시스템 교체. 업무 공간의 공기질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유지비용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에, 경영진은 되도록 기존 장치를 유지하려하고 직원들은 '이러다 직원 다 죽는다'며 새 시스템으로의 교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렬이라니...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듯한 참혹한 아침이었다.
"후우...."
75층 사무실에 들어와서 방독면을 벗고 내 책상에 앉으니 온 몸이 노곤했다. 내 책상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당자리였다. 창 밖으로 멀리 선정릉이 보이니까 말이다. 서울 강남내 유일한 녹지 공간 선정릉. 아파트를 지어도 지어도 모자란통에 녹지가 다 사라졌지만 선정릉만은 왕릉이라는 문화재 보호구역에 녹지공간이라는 이중보호막을 갖춘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선정릉의 푸른 녹지가 보인다. 얼마나 소중한 '녹색'이던가.
"아마 저 공간마저 사라진다면 저만큼의 정신병원이 들어설거야."
모닝커피를 홀짝이며 김 부장님이 중얼거렸다. 공감한다. 녹색을 본지 얼마나 됐던가. 곳곳에서 우울증과 심한 스트레스에 엽기적인 사건들이 이어졌다. 컴퓨터를 켰더니 톱스타를 출연시킨 배너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녹색을 보자, 단 하루만이라도..."
금융회사의 재테크 광고였다. 지하가 아닌 옥외에서 녹색의 자연을 만끽하려면 분양단가 100억원 대의 '녹색마을' 콘도미니엄에 입주해야 하는데 우리같은 직장인이 어느 세월에 백 억을 모을 수 있겠는가, 다양한 재테크 기법을 전문가의 컨설팅으로 안내해준다는 광고문안을 스크랩한 뒤 업무를 시작했다. 아참참, 업무시작전에 주문처럼 시작하는 일을 잊었다. 책상 위 화분에 물 주기. 이름모를 들꽃 한송이, 매일 물을 주고 있었다. 조화가 아닌 진짜 꽃 말이다. 친한 친구가 목숨걸고 자연트레킹을 하다가 살짝 캐왔다며 선물로 받았다. 꽃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땐 왜 몰랐을까. 30년 전에 말이다. 벌이 사라지고 꽃이 일찍 피어나고 기후가 변하기 시작하던 그 골든 타임에 우리는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실천하지 못했을까. 살기 바쁘다고, 내 코가 석자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 그 일들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는데...북극곰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는데, 그 때는 왜 몰랐을까?
"I'll survive"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올드 팝 한 곡을 클릭해 듣는다. 1978년 글로리아 게이너라는 흑인 디바가 부른 노래 I'll survive, 나는 살고싶다는 그 간절한 멜로디가 흥겨운 리듬 속에 펼쳐지면서 오늘 아침 처절했던 출근길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
